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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에 처음 입사했을 때의 일이다. Y라는 분이 나의 지도 선배가 되었다. 배정은 받았지만 이틀 동안 나는 얼굴을 볼 수 없었다. Y가 휴가 중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의 책상 앞에 걸린 사진을 보며 '어떤 사람일까' 상상에 빠졌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 된 것 같았다. 볼 살이 조금 있는 것으로 보아 마른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입꼬리와 볼 살은 축 늘어나 있었다.

  사흘 뒤, 그가 드디어 나타났다. 나의 예상과 꼭 닮은 모습으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Y의 옆자리에 앉았다. 나는 새로 지급 받은 컴퓨터를 켰지만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외계어로 쓰여진 것 같은 이메일 몇 개를 열어 읽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Y는 담배 피러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나는 비흡연자였지만 친해지고 싶어 따라 나섰다. 그 곳에서 나는 담배 대신 캔커피를 입에 물고 Y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Y는 '빚을 내지 말라'고 했다. 자신은 부모와 사이가 매우 안 좋단다. 심지어 결혼할 때에도 부모의 도움을 안 받았다고 했다. 최근에는 명절에도 친가를 찾지 않을 정도란다. 그렇게 홀로 결혼 자금을 마련하려다 보니 빚을 조금 낸 모양이다. 빚 때문에 당장 힘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앞으로의 생활이 꽤 걱정스러운 듯 보였다. 그 외에도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친한 사이에서나 나눌 법한 내용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왜 이런 말을 하나 싶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Y의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큰 불만은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Y는 대부분 일을 혼자 했다. 나에게 일을 잘 가르쳐 주지도 않고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그가 하는 일의 목적도 모른 채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는 일은 정말 곤욕이었다. 가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면 납득할 수 없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퇴근도 엄청 눈치를 봐야 했다. 결코 나에게 먼저 '집에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Y는 팀원 모두가 참석하는 회의에도 잘 가지 않았다. 회의 시간이 시간 낭비라고 여겼던 것 같다. 비록 신입사원인 내가 회의에 참석하더라도 발언권은 없겠지만 업무를 익히는 것에는 도움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내게 없었다.

  Y와 함께 다닌지 한 달쯤 되었다. Y는 부서 내에서 '아웃 사이더'로 불리고 있었다. 다른 선배들은 그런 지도 선배를 모셔야 하는 나를 매우 불쌍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에게 지도를 받은 사람이 여럿 있었으나 대부분 끝은 안 좋았단다. 참지 못하고 부서장에게 건의해 Y의 품에서 벗어난 사람도 있었다. 선배들은 기회만 된다면 나도 Y에게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Y의 행동들이 이해가 갔다. 그리고 Y와 같이 다닌다는 사실이 점점 싫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부서 내의 B 프로젝트 일에 일손이 모자랐다. 부서장은 나에게 그 일을 도와주라고 했다. B 프로젝트 일을 돕게 된다면 1주일에 2일은 Y와 떨어져 있게 된다. 기분 좋은 웃음이 나오는것을 간신히 참았다. Y는 이 사실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틀이나 혼자 일하게 된다면 업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고 했다. 그러나 끝내 부서장은 자기의 의견을 고집했다. Y는 울컥해서 말했다. 지도 선배 짓을 하기 싫었는데 맡을 사람이 없어 억지로 맡았는데 이제 더 이상은 못 하겠다고.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갑자기 부모에게 '너는 사실 한강 밑에서 주워왔어'라는 말을 들으면 아마 이런 기분일까? 그 자리에서 나도 한 마디 하고 싶었다. '사실 나는 Y의 말동무일 뿐이었다고. Y에게 그동안 배운 건 하나도 없다고. 나도 억지로 그를 모셨다고.'

  그 후, 나는 새로운 지도 선배를 맞았다. Y는 다른 부서로 옮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퇴사했다. 퇴사한 후, 대학원을 갔다 거나 경쟁사로 이직을 했다는 등의 소문은 있었지만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그가 떠난 후 2년 정도가 지난 어느 여름날. 식당에서 끈끈이 주걱에 잡힌 파리를 발견했다. 살기 위한 최후의 날갯 짓을 해보지만 쓸데없었다. 밥을 서둘러 먹고 사무실로 올라가는데 상사에게 혼나는 선배의 모습이 보였다. 제출한 보고서가 문제였나 보다. 나중에 커피를 마시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그 선배는 마지막까지 완벽을 기하기 위해 수정을 거듭하다 막차를 놓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단다. 그것도 모자라 다음날 아침에도 보고서 수정에 시간을 쏟았다. 그러나 노력의 댓가는 가혹했다. 그 선배는 뭘 해도 혼이 난다며 의욕이 없다고 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 나에게 회사 생활의 밝은 미래를 말했었다. 1년 단위의 구체적인 계획도 간직했던 그 선배의 갑작스런 변화에 머리가 멍해졌다. 문득, 잊고 있었던 Y의 존재가 떠올랐다. 어쩌면 Y도 세상의 벽에 부딪혀 점점 자신만의 꿈을 잃어버리게 된 현실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Y를 향한 'Why'라는 물음표가 조금은 풀린 것 같다. Y와 같은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야겠다. 나 또한 언젠가는 Y가 될지 모를테니······

 


  지금 여러분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는지 돌아보세요. 혹시 당신의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발견하셨다면 그(녀)를 도울 계획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여러분의 방법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발상을 가져올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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